임씨의 시조는 휘(諱) 온(溫) 이시며 중국 소흥부 자계현 분으로 그의 5세손(世孫)인 장남 휘(諱) 천유(天裕)는 풍해군(豊海君)이시며, 차남 휘(諱) 천록(天祿)이 우리 곡성임씨의 시조가 되신다.

시조공께서는 고려 원종시(1269 ~ 1274)  중현대부군기시윤(中顯大夫軍器寺尹)을 지내셨고 곡성군 천덕산 아래 삼인동(三仁洞)에 거주하시어 곡성군(谷城君)으로 봉(封)하고 후손들이 본관(本貫)을 곡성(谷城)으로 하게 되었다.

일부에서는 시조공 휘(諱) 천록(天祿)의 아드님이신 휘(諱) 영진(英進)을 시조로 표기한 바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으로 앞으로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.

갑진보(甲辰譜,1844년) 편찬당시 서문(序文) 한  영의정을 지낸 양주인 조두순(趙斗淳)은 그의 저서 심암유고(心庵遺稿)에 곡성임씨 세보 서문을 싣고 설명하기를 임씨는 풍천임씨가 현달(顯達)하고 다음으로 장흥임씨(長興任氏)와곡성임씨(谷城任氏)는 소종(小宗)이지만 대종(大宗)한테와 같다 (任氏於豊川爲著姓長興谷城者猶小宗之於大宗)고 하였다. 또한 계유보(癸酉譜,1873년)에 서문을 쓴 이조 판서를 지낸 풍천인(豊川人) 백수(白秀)공도 풍해군(豊海君)의 아우가 있는데 그가 곡성군(谷城君)이라고  서문 하였다.

또한 시조에 대하여는 선대의 묘소가 일부 멸실되고 문헌의 고증(考證)이 부족함이 있으나 창원(昌原)인 황응규(黃應奎,1518 ~ 1599)의 송간선생문집(松澗先生文集)에 그의 고조부(高祖父, 黃 躔)의 묘비를 세우며 고조비(高祖妣)인 곡성임씨 묘비에 夫人谷城望族 知端州事諱載其祖 諱遜其考 甥琴用和生夫人... 이라고 기재되어 있고 묘비는 현재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보계리에 현존하고 있다. 위 내용을 통하여 보면 3세 지단주사(知湍州事) 휘 재(諱 載)는 시조 휘(諱) 천록(天祿)의 손자요 , 4세 휘 손(諱 遜)은 좌우위중랑장(左右衛中郞將)을 지낸 휘(諱) 복룡(伏龍)의 부(父)가 되신다. 그의 어머니는 낭장(郎將)을 지낸 봉화금씨(奉化琴氏) 용화(用和)의 따님이라 하셨으니 우리 세보의 기록과 같다.  

이후 우리임씨는 8세로 내려와 성균관 사성(司成)을 지내신 휘(諱) 계중(繼重)과 아우이신 헌릉(獻陵) 참봉(參奉)을 지내신 휘(諱) 계문(繼文)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.